회귀는 없다

바닥에서 쓴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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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발라드
EPISODE 01
4분
서울 서초동, 겨울 아침. 유리 건물 외관. 12층 창문에 형광등 불빛이 켜져 있다. 하늘이 흐리다.

2024년 12월 19일, 목요일. 서울 서초동.

글로벌트레이드. 직원 43명. 연매출 200억. 수출입 전문. 박진호가 맨손으로 세운 회사.

15년 전, 진호는 사무실 하나 없이 시작했다. 중국 공장을 돌며 명함을 돌리고, 식당에서 바이어를 만나고, 새벽까지 견적서를 썼다. 5년 만에 매출 10억을 넘겼고, 10년 만에 100억을 찍었다. 12층 사무실 창문에서 남산이 보이기까지, 하루도 쉬지 않았다.

아홉 시 정각에 출근하는 법이 없었다. 늘 여덟 시 반이었다. 그날도 여덟 시 반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다. 진호 차가 아니라 세 대 앞 차였다. 40분을 막혔다.

회사에 도착한 시각, 아홉 시 삼 분.

* * *
건물 로비. 엘리베이터 앞.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서류 봉투를 안고 있다.

엘리베이터 앞에 김 과장이 서 있었다. 얼굴이 하얬다.

김과장
"대표님, 저... 12층에—"
박진호
"무슨 일이야?"

김 과장이 입을 열었다 닫았다. 두 번.

김과장
"이사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진호의 걸음이 멈췄다.

오늘 이사회 일정은 없었다. 달력에도 없고, 통보도 없었다.

박진호
"누가 소집했어?"

김 과장이 대답하지 못했다. 눈을 피했다. 그 눈이 대답이었다.

12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복도가 조용했다. 평소엔 직원들이 오가는 시간인데,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가 비우라고 한 것 같았다.

회의실 유리 너머로 안이 보였다. 이사 다섯 명. 전원 출석.

평소 셋도 겨우 모이던 이사회였다.

* * *
회의실 내부. 긴 테이블에 정장 차림의 남자 다섯. 가운데 자리에 앉은 남자가 문 쪽을 보고 있다. 창 밖으로 흐린 하늘.

진호가 문을 열었다.

가운데 자리에 최승재가 앉아 있었다.

진호의 자리였다.

최승재. 공동창업자. 아니, 이름만 공동창업자였다. 창업할 때 진호가 돈이 부족해서 3천만 원을 빌렸다. 갚았다. 이자까지. 그래도 승재는 지분 30%를 갖고 있었다. 고마워서 줬다. 같이 고생했으니까. 15년 전에.

최승재
"어, 진호 씨. 앉아."

'씨'. 진호 씨. 작년까지 형이라고 불렀다. 재작년 송년회에서 어깨동무하고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 돌잔치에 서로 갔다.

진호는 서지 않았다. 앉지도 않았다. 문 앞에 섰다.

테이블 위를 봤다. 서류 뭉치. 긴급 이사회 소집 통지서. 표지에 날짜가 찍혀 있었다. 어제. 12월 18일 오후 6시 12분 발송. 진호가 퇴근한 직후.

법이 요구하는 1일 전 통지. 정관이 허용하는 긴급 소집 절차. 한 글자도 빠짐없이 적법하게 짜여 있었다.

박진호
"이게 뭐야."

물어본 게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물었다.

최승재
"읽어봐."

안건 제목.

'제1호 안건 — 대표이사 해임의 건.'

글자가 눈에 박혔다. 해임. 자기 이름 옆에 해임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다.

진호의 시선이 테이블을 돌았다. 이사 다섯 명. 하나씩 봤다.

양쪽에 앉은 이사 둘이 고개를 돌렸다. 눈을 피했다. 지난주까지 진호와 소주를 마시던 얼굴이었다. 지난달 워크숍에서 진호가 택시비를 내준 사람들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이사 한 명이 진호를 봤다. 3초. 시선을 내렸다. 그 사람은 면접 때 진호가 직접 뽑았다.

승재만 진호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진호의 자리에 앉아서, 웃고 있었다.

최승재
"이사 다섯 중 셋이 찬성이야. 과반이면 되지."

준비된 숫자였다. 어제오늘 만든 게 아니었다. 한 명씩 따로 만나서, 따로 설득하고, 따로 다짐을 받아놨을 거다. 진호가 모르는 사이에.

박진호
"승재야."
최승재
"응?"
박진호
"15년이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았다. 15년 동안 협상 테이블에 앉아온 사람이었다. 목소리로 흔들리는 법은 오래전에 버렸다.

박진호
"우리가 처음 시작할 때 사무실이 어디였는지 기억나?"

승재의 표정이 0.5초 멈췄다.

박진호
"구로디지털단지. 반지하. 여름에 곰팡이 피어서 니가 기침하면 내가 약 사다 줬어. 기억나?"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이사 넷이 테이블만 봤다.

박진호
"겨울에 보일러 터져서 사무실에서 잤잖아. 둘이. 패딩 입고. 그때 니가 뭐라 그랬는지 알아? '형, 우리 10년만 버티자. 10년이면 된다.' 그랬어."

승재가 자세를 바꿨다. 등을 펴고 턱을 들었다. 표정을 정리하는 데 2초 걸렸다.

최승재
"그래서? 경영은 숫자야, 진호 씨. 15년이 무슨 상관이야. 이게 사업이야."

눈이 웃지 않았다. 처음부터.

진호는 그제야 봤다. 이 남자가 언제부터 이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표정은 — 연습한 얼굴이었다.

오래 전부터 준비한 거였다.

박진호
"근거가 뭔데. 해임 사유가 뭐야."
최승재
"경영 판단 미스. 작년 동남아 프로젝트 적자. 이사회 결의로 충분해. 너도 알잖아."

동남아 프로젝트. 진호가 반대한 건이었다. 승재가 밀어붙였다. 진호가 양보했다. "네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해봐." 그랬다.

그 양보가 칼이 됐다. 대표이사 최종 결재. 서류상으론 진호 책임이었다.

설계였다. 프로젝트를 밀어붙인 것도, 실패하게 둔 것도, 서류에 진호 이름을 올린 것도 — 전부 설계.

아닐 수도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진호의 머리가 만들어낸 피해의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승재의 표정이 — 너무 편안했다.

* * *
회의실. 서류 위에 손이 올라가 있다. 펜을 든 손. 찬성에 체크하는 장면.

표결이 시작됐다.

최승재
"찬성하시는 분."

손 세 개가 올라갔다. 승재 포함.

나머지 둘은 손을 올리지 않았다. 반대도 하지 않았다. 기권.

찬성 3. 반대 0. 기권 2.

소요 시간 4분.

세우는 데 15년 걸린 것을 무너뜨리는 데 4분이면 충분했다.

회의실이 조용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승재가 서류를 정리했다. 종이 넘기는 소리만 났다.

진호는 문 앞에 서 있었다. 한 발짝도 안으로 들어간 적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문 앞에 서서 당했다.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은 있었다. 많았다. 15년치의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 삼켰다.

삼킨 이유는 단순했다. 저 다섯 명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돌아섰다.

최승재
"진호 씨."

멈추지 않았다.

최승재
"사물함 정리는 내일까지 해줘. 보안카드는 경비실에 반납하고."

복도를 걸었다. 구두 소리가 울렸다. 이 복도를 매일 걸었다. 5,400일 넘게. 눈 감고도 걸을 수 있었다.

마지막이었다.

* * *
빌딩 1층 로비. 경비 데스크 앞. 박스 하나가 놓여 있다.

1층. 경비가 박스를 내밀었다.

볼펜 세 자루. 액자 하나 — 지우가 유치원 때 그린 그림. 충전기 하나. 손거울 하나. 명함 묶음.

그게 전부였다.

15년의 무게가 그 정도였다. 양손으로 들 수 있었다. 무겁지도 않았다.

경비가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수고하십니다, 대표님." 매일. 5년.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안카드를 데스크 위에 올려놓았다. 딸깍 소리가 났다.

* * *
빌딩 앞 인도. 겨울 아침. 코트 차림의 남자가 작은 박스를 든 채 서 있다. 회전문이 닫히고 있다.

회전문을 나섰다.

12월 바람이 불었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진호 옆을 지나갔다. 커피를 들고, 이어폰을 꽂고, 전화를 하면서. 누구도 진호를 보지 않았다. 서초동의 아침은 원래 그랬다. 모두가 바빴고 모두가 자기 일로 걸었다.

진호도 1분 전까지 저 사람들 중 하나였다. 12층에서 남산을 내려다보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박스를 든 사람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봤다. 수진. 아내.

받지 않았다. 뭘 말해야 할지 몰랐다. 아직은.

전화가 끊겼다. 다시 울렸다. 또 끊겼다. 세 번째는 오지 않았다.

박스를 들고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지 정하지 않았다. 발이 움직이니까 따라갔다.

12월 바람이 뺨을 갈겼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곳이 없었다.

EPISODE 02
서명
아파트 거실. 낮. 커튼이 쳐져 있다. 소파에 남자가 앉아 있다. TV가 꺼져 있다. 테이블 위에 박스 하나.

3일이 지났다.

진호는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틀째.

커튼을 치지 않았다. 밤인지 낮인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핸드폰 충전기를 꽂지 않았다. 전화가 안 오는 게 편했다.

수진이 말을 걸었다. 두 번. "밥 먹어." "진호 씨." 진호는 고개만 끄덕였다. 수진은 더 묻지 않았다.

지우가 학교에서 돌아와 진호를 봤다. 아빠가 낮에 소파에 앉아 있는 게 이상했을 거다. 열두 살은 이상한 걸 눈치챈다.

박지우
"아빠, 회사 안 가?"
박진호
"...오늘 쉬는 날이야."

거짓말. 어제도 쉬는 날이라고 했다. 내일도 그럴 거였다.

지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더 묻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갔다.

진호는 천장을 봤다. 서초동 12층 천장은 3미터였다. 여기는 2.4미터. 같은 천장인데 높이가 달랐다. 그게 전부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정확히는 — 뭘 해야 하는지 몰랐다. 15년 동안 매일 할 일이 쌓여 있던 사람이, 처음으로 할 일이 없었다.

* * *

넷째 날 오전. 핸드폰이 울렸다. 충전이 7% 남아 있었다.

모르는 번호. 02 국번.

받았다.

검찰수사관
"박진호 씨 되십니까?"
박진호
"네."
검찰수사관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입니다. 고소 사건 관련해서 출석 요구 통지 드립니다."

진호의 등이 펴졌다.

박진호
"고소요? 무슨 고소?"
검찰수사관
"업무상 횡령 혐의입니다. 글로벌트레이드 법인 자금 23억 원 유용 건으로, 고소인은 최승재 씨입니다."

심장이 멈춘 줄 알았다. 멈추지 않았다. 대신 빨라졌다.

횡령. 23억. 최승재.

박진호
"23억이요? 내가?"
검찰수사관
"상세 내용은 출석 시 안내드리겠습니다. 일정 조율 —"

목소리가 멀어졌다.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숫자가 돌았다. 23억. 법인 자금. 횡령.

진호가 건드린 적 없는 돈이었다.

* * *
거실 소파. 남자가 전화기를 내리고 허공을 보고 있다. 손에 힘이 빠져 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느리게. 한 조각씩.

3년 전이었다.

승재가 말했다. "형, 나 법인 계좌 관련해서 서류 처리 좀 해야 하는데, 포괄위임장 하나만 해줘. 은행이랑 세무 쪽 실무야. 내가 다 처리할게."

진호는 사인했다. 의심하지 않았다. 15년을 같이 한 사람이었다. 반지하에서 패딩 입고 같이 잔 사람이었다.

그 서명이.

포괄위임장. 대표이사 명의의 포괄적 권한 위임. 법인 계좌 이체, 자산 처분, 계약 체결 — 위임 범위에 제한이 없었다. 진호가 읽지 않고 사인한 건 아니었다. 읽었다. 범위가 넓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사인했다. 승재니까.

그 위임장으로 23억을 움직인 거였다. 서류상 결재자 — 박진호. 위임받은 실행자 — 최승재. 하지만 검찰이 보는 건 결재자 이름이었다.

빌려준 서명으로 칼을 만든 거였다.

진호의 손이 떨렸다. 분노였다. 4분짜리 이사회 때는 느끼지 못한 분노가 — 지금 올라왔다.

해임은 참을 수 있었다. 빼앗긴 거니까. 싸우면 되니까.

그런데 이건 달랐다. 도둑으로 만든 거였다. 15년 동안 한 푼도 빼돌리지 않은 사람을, 서류 한 장으로 도둑으로 만들었다.

* * *

그 주에 일이 터졌다. 하나씩이 아니라 한꺼번에.

은행 ATM 화면. '거래 제한 계좌입니다' 메시지.

월요일. 자산보전처분. 통장이 얼었다. 카드가 잠겼다.

ATM 앞에서 화면을 세 번 봤다. '거래 제한 계좌입니다.' 세 번 다 같은 메시지. 뒤에 줄 선 사람이 기침했다. 비켜섰다.

화요일. 아파트에 가압류 딱지가 붙었다. 현관문 옆. 형광 노란색 스티커. 수진이 먼저 봤다. 아무 말 없이 딱지를 뗐다. 떼도 소용없다는 걸 둘 다 알았다.

수요일. 뉴스가 나갔다.

스마트폰 화면. 뉴스 기사 제목 — '200억 매출 수출 기업 대표, 법인자금 23억 횡령 퇴진'. 댓글 아이콘 옆에 숫자 847.

'200억 매출 수출 기업 대표, 법인자금 23억 횡령 퇴진.'

기사가 퍼졌다. 빨랐다. 오전에 올라와서 오후에 포털 실시간에 걸렸다. 경제면이 아니라 사회면이었다.

댓글.

'사기꾼.' '200억 벌어놓고 23억을 처먹어?' '이런 놈들 때문에 자영업자가 힘든 거임.' '도둑놈.' '쓰레기.'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기사 한 줄 읽고, 5초 만에 사람을 규정하는 사람들이었다.

진호는 댓글을 끝까지 읽었다. 스크롤을 내리고, 또 내리고. 847개. 전부 읽었다.

왜 읽었는지 모르겠다. 멈출 수가 없었다. 자기에 대한 글이었다. 전부 틀린 글이었다. 그런데 멈출 수가 없었다.

읽고 나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손이 차가웠다.

* * *
밤.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남자가 앉아 있다. 앞에 소주병 두 개. 셋째 병을 따고 있다.

밤이었다.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수진의 눈을 볼 수 없었다. 지우에게 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내일도 쉬는 날이라고. 아빠 회사 문제없다고. 뉴스에 나온 사람 아빠 아니라고.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소주를 샀다. 한 병 4,500원. 안주 없이.

한 병. 목구멍이 탔다. 속이 비어서 알코올이 바로 돌았다.

두 병. 서초동이 떠올랐다. 회의실. 승재의 얼굴. "경영은 숫자야, 진호 씨." 그 얼굴이 웃고 있었다. 아직도.

셋째 병을 따는 손이 떨렸다. 분노가 아니었다.

허탈이었다.

15년 동안 쌓은 것 — 회사, 이름, 신용, 관계 — 그것들이 자기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서류 한 장, 표결 한 번, 기사 한 줄이면 사라지는 것들이었다.

자기 것이라고 믿었던 모든 게 빌린 거였다.

셋째 병을 마셨다. 편의점 형광등이 흔들렸다. 아니, 눈이 흔들리는 거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수진.

이번엔 받았다.

이수진
"진호 씨, 어디야?"
박진호
"...밖이야."
이수진
"뉴스 봤어."

짧았다. '뉴스 봤어.' 세 글자.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게 없었다. 아니라고 해도 기사가 있었다. 맞다고 하면 거짓이었다. 설명해도 믿어줄지 몰랐다.

이수진
"아버지가 전화했어. 매일."

장인. 진호를 처음부터 반대한 사람이었다. 학벌이 없다고. 사업이 뭔 사업이냐고. 수진이 밀어붙여서 결혼한 거였다. 10년 동안 매출이 올라가니까 장인도 인정했다. "사위가 능력이 있어." 명절마다 그랬다. 자랑이었다.

뉴스가 나간 뒤로 매일 전화한다. 딸 데리고 나오라고. 그 사기꾼이랑 같이 있지 말라고.

사기꾼.

장인도 댓글창의 사람들과 같은 단어를 쓰고 있었다.

이수진
"진호 씨."
박진호
"응."

수진의 숨소리가 들렸다. 길었다. 말을 고르고 있었다. 수진은 원래 그랬다. 중요한 말 앞에서 숨을 길게 쉬었다.

진호는 알았다. 다음에 나올 말을.

15년 동안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이었다. 상대가 '아니오'를 말하기 전에 눈빛으로 읽었다. 수진의 숨소리는 눈빛보다 선명했다.

이수진
"나... 더는 못하겠어."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 듣는 건 달랐다. 아는 것과 듣는 것 사이에 간격이 있었다. 그 간격이 명치를 쳤다.

이수진
"지우는 내가 데리고 갈게."

지우.

열두 살. 올해 중학교 입학. 아빠가 학교 보내줄 거라고 했다. 교복 사러 같이 가자고 했다.

이수진
"미안해."

미안한 건 진호 쪽이었다.

수진이 잘못한 건 없었다. 남편이 해임당하고, 횡령범이 되고, 집에 가압류가 붙었다. 열두 살 딸이 있다. 떠나는 게 맞았다.

맞는데 — 맞는 게 이렇게 아팠다.

박진호
"...알았어."

두 글자. 그게 전부였다.

전화가 끊겼다. 화면이 꺼졌다.

소주가 남아 있었다. 셋째 병 반쯤. 마저 마시려다 내려놓았다.

취해야 할 것 같은데, 취하지 않았다. 머리가 맑았다. 이상하게 맑았다. 서초동 잃고, 통장 잃고, 이름 잃고, 아내 잃고 — 잃을 때마다 머리가 맑아지는 게 이상했다.

바닥이 가까워지면 시야가 넓어진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었다. 거짓말이었다. 넓어지는 게 아니라, 볼 게 없어지는 거였다.

편의점 형광등 아래 앉아 하늘을 봤다. 서울 하늘에 별은 없었다.

수진 목소리가 귓속에 남아 있었다. '미안해.' 미안한 건 나인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소주병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일어섰다.

집으로 갔다. 현관문을 열었다. 불이 꺼져 있었다. 수진과 지우는 안방에서 자고 있었다.

소파에 앉았다. 코트를 벗지 않았다.

돌아갈 곳이 없었다. 아직 집인데, 이미 돌아갈 곳이 아니었다.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제2화 끝

제3화 — 작은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