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20.
아침 8시. 커피를 마시며 대시보드를 열었다. 습관이었다.
숫자가 올라가 있었다.
500만 원. 정확히.
진호는 화면을 봤다. 숫자를 읽었다. 다시 읽었다.
스마트스토어 189만. BizSpread 294만. 유튜브 11만. 후원 5만 8천.
BizSpread가 스마트스토어를 넘었다. 물건을 파는 것보다 도구를 파는 게 더 벌었다.
7개월 전, 일당 12만 원으로 벽돌을 날랐다. 월 360만 원. 몸이 부서지도록 일해서.
지금은 500만 원. 노트북과 AI로. 몸은 멀쩡했다. 머리만 썼다.
아니, 머리만 쓴 건 아니었다. 벽돌 나르면서 배운 것들이 있었다. 멈추지 않는 것. 에러가 나도 다시 시도하는 것. 매일 5시에 일어나는 것.
삽이 가르쳐준 거였다. 키보드가 아니라 삽이.
단말기 화면이 바뀌었다.
Lv.3. 칭호 — '시스템을 만드는 자.'
만드는 자. 맞았다. 진호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AI와 함께.
처음에는 물건을 팔았다. 다음에는 도구를 팔았다. 다음에는 — 뭘 팔 수 있을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시스템 자체를.
하지만 그건 다음 미션의 이야기.
창밖을 봤다. 원룸 창문. 4월 말. 봄이 깊어지고 있었다.
7개월 전 12월 바람이 불었다. 서초동 빌딩 회전문 앞에서. 뺨을 갈기던 바람.
지금은 봄바람이 불었다. 따뜻하지는 않았다. 4월 말은 아직 쌀쌀했다. 하지만 — 12월은 아니었다.
계절이 바뀌었다. 진호도 바뀌었다.
커피를 마저 마셨다. 영수에게 전화했다.
약속을 지켰다. 올려준다고 했으니까.
진호가 웃었다. 영수도 웃었다.
글로벌트레이드에서 직원 월급 올려줄 때는 느끼지 못한 게 있었다. 43명 전체에 일괄 인상. 숫자였다. 서류였다.
영수 한 명에게 50만 원. 이건 — 이름이 있는 인상이었다. 얼굴이 있는.
다음에 또 올려야 했다. 500만 원이면 아직 빠듯하다. 1,000만 원이 되면 300. 3,000만 원이 되면 500.
계산이 돌았다. 사업가의 머리.
멈추지 않았다. 앞으로.
Day 122.
부동산에서 소개받은 곳이었다. 오피스텔 1층. 10평. 월세 60만 원. 보증금 300만 원.
가압류 일부 해제로 풀린 돈이 있었다. 거기에 매출에서 모은 돈을 합치면 — 보증금이 됐다.
10평. 원룸의 1.7배. 고시원의 5배. 서초동 12층의 — 비교 불가.
하지만 10평이면 충분했다. 책상 두 개. 노트북 두 대. 택배 포장할 공간. 그리고 영수 자리.
이게 사무실이었다.
진호는 건물 앞에 서서 올려다봤다. 유리창이 반짝거렸다. 서초동만큼 높지는 않았다. 12층이 아니라 1층이었다. 남산이 안 보였다. 대신 — 골목이 보였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부동산 사장이 계약서를 꺼냈다. 서명했다. 이번엔 — 자기 이름으로. 개인사업자 박진호.
포괄위임장이 아니었다. 남에게 빌려주는 서명이 아니었다. 자기 사업의 자기 이름.
저녁. 원룸에 돌아왔다. 짐을 쌀 필요는 아직 없었다. 사무실은 사무실이고, 집은 집이었다. 고시원에서처럼 살면서 일하지 않아도 됐다.
분리. 일과 삶의 분리. 7개월 만에 처음.
핸드폰을 들었다. 연락처. '지우'.
지우가 기대하고 있었다. 전에 전화했을 때 '좋은 일 있었어'라고 했으니까.
대박. 열두 살의 최고 감탄사.
또 약속. 이번엔 — 지킬 수 있는 약속.
전화를 끊고 창밖을 봤다. 원룸 창문. 저녁 하늘. 노을이 지고 있었다. 주황색과 남색 사이.
단말기를 봤다. 파란 빛이 깜빡거렸다.
뒤를 돌아보라고.
서초동을 나올 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곳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달랐다. 돌아보면 — 길이 있었다. 고시원에서 인력사무소까지의 새벽길. 인력사무소에서 현장까지의 봉고차. 현장에서 고시원까지의 지하철. 고시원에서 원룸까지의 이사. 원룸에서 사무실까지의 계약서.
한 걸음씩이었다. 빠르지 않았다.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 멈추지 않았다.
기계가 말했다. 뒤를 돌아보라고.
이번엔 돌아봤다.
길이 있었다. 분명히.
진호는 노트북을 열었다. 홈페이지. 소설 페이지.
새 화를 쓰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시작한 남자의 이야기. 자기 이야기.
타이핑했다. 천천히. 한 글자씩.
'회귀는 없다. 돌아갈 수 없다.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 앞으로 갈 수는 있다.'
'삽을 잡았던 손으로 키보드를 잡았다. 벽돌을 나르던 어깨로 사업을 올렸다. 고시원 천장을 보던 눈으로 하늘을 봤다.'
'회귀는 없다. 대신 — 시작은 있다.'
커서가 깜빡거렸다. 노트북의 커서와, 옆에 놓인 단말기의 파란 빛이, 동시에 깜빡거렸다.
같은 리듬으로.
마치 — 같은 곳에서 온 것처럼.
진호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직은.
타이핑을 계속했다.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