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기 15-16화
피아노 발라드
EPISODE 15
제15화
고시원 복도. 밤. 남자가 복도 창가에 서서 핸드폰을 들고 있다. 화면에 연락처가 보인다. '지우'.

Day 45.

밤 9시. 고시원 복도.

진호는 핸드폰을 들고 서 있었다. 연락처 화면. '지우'. 수진 번호가 아니라 지우 번호였다. 중학교 입학하면서 핸드폰을 받았다. 수진이 사줬을 거다.

번호는 알고 있었다. 수진이 조정 끝나고 문자로 보내줬다. '지우 번호예요. 가끔 연락해도 돼요.'

가끔. 그 단어가 무거웠다. 매일이 아니라 가끔.

45일 동안 한 번도 안 걸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아빠 지금 고시원에서 살아. AI로 노래 만들어서 유튜브에 올리고, 인터넷으로 콘센트 커버 팔고 있어.' 열두 살한테 그걸 어떻게 말하나.

그런데 오늘 — 손이 움직였다.

이유가 있었다. 오늘 스마트스토어 매출이 하루 최고를 찍었다. 하루 5건. 74,500원. 작은 숫자지만 — 뭔가가 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뭔가가 되고 있을 때, 지우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째에서 — 받았다.

박지우
"...여보세요?"

목소리가 달랐다. 3개월 전보다 조금 — 낮아진 것 같았다. 아니, 착각일 수도 있었다. 3개월이면 목소리가 바뀌나. 열두 살이면 바뀔 수도 있다.

박진호
"지우야."
박지우
"...아빠?"

1초 침묵.

박지우
"아빠!"

목소리가 높아졌다. 놀란 거였다. 기쁜 건지 놀란 건지 — 둘 다인 것 같았다.

박진호
"응. 아빠야."
박지우
"왜 이제야 전화해! 번호 알면서!"

화가 난 거였다. 열두 살짜리 화. 진짜 화가 아니라 서운한 거였다.

박진호
"...미안."
박지우
"미안하면 빨리 전화했어야지."
박진호
"그래. 미안해."

할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미안. 미안해. 변명은 안 했다. 바빴다는 말도, 힘들었다는 말도 안 했다. 열두 살한테 그건 이유가 안 됐다.

박지우
"아빠 어디 살아?"
박진호
"좀 작은 데서 살아. 일 때문에."
박지우
"얼마나 작은데?"

2평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박진호
"혼자 살기엔 충분해."
박지우
"밥은?"
박진호
"먹어."
박지우
"뭐 먹는데."
박진호
"도시락."
박지우
"매일?"

진호가 웃었다. 소리 없이. 딸이 아빠 밥을 걱정하고 있었다.

박진호
"아니. 가끔 국도 먹어."
박지우
"...아빠."
박진호
"응."
박지우
"나 데리러 올 거지? 아직도?"

아직도.

'아직도'가 붙었다. 3개월 전에는 '올 거지?'였다. 이제 '아직도'가 붙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확신이 줄어든 거였다. 당연하다. 3개월 동안 연락도 안 한 아빠를 어떻게 믿나.

이번엔 목이 안 막혔다.

박진호
"갈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소리를 냈다. 목소리로.

박진호
"좀 걸릴 수도 있어. 근데 — 꼭 갈게."

3초간 침묵.

박지우
"...알았어."

지우의 '알았어'는 진호의 '알았어'와 같았다. 믿고 싶은데 확신은 없는 목소리.

박지우
"아빠, 나 이제 끊어야 해. 외할머니가 불러."
박진호
"그래. 끊어."
박지우
"또 전화해. 꼭."
박진호
"꼭."

전화가 끊겼다. 통화 시간 2분 34초.

진호는 핸드폰을 내렸다. 복도 창밖을 봤다. 가로등. 골목. 어두운 하늘.

2분 34초. 짧았다. 하지만 충분했다.

지우가 살아 있었다.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밥 걱정을 했다. '또 전화해'라고 했다.

아직 기다리고 있었다.

진호는 방으로 돌아왔다. 노트북을 열었다.

100만 원. 아직 안 됐다. 29만 원. 71만 원이 남았다.

빨리 해야 했다.

EPISODE 16
제16화
편의점. 밤. 남자가 커피를 들고 서서 핸드폰 뉴스를 보고 있다. 화면에 기사 제목이 보인다.

Day 50.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고 나오다 핸드폰이 울렸다. 카카오톡. 모르는 번호가 아니라 — 김 과장이었다. 글로벌트레이드 김 과장. 해임당한 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얼굴이 하얘졌던 사람.

5개월 만에 연락이 왔다.

김과장
"대표님... 아, 죄송합니다. 진호 씨."
박진호
"괜찮아. 무슨 일이야."
김과장
"혹시 아셨나 해서요. 회사 상황."

진호의 눈이 좁아졌다. 회사. 글로벌트레이드.

박진호
"모르는데."
김과장
"최 대표가... 동남아 프로젝트를 또 밀어붙였거든요. 이번엔 베트남. 근데 파트너가 먹튀를 했어요. 선금 4억을 날렸습니다."

4억.

김과장
"직원들 월급이 두 달째 밀렸어요. 7명이 나갔습니다. 43명에서 36명."

월급이 밀렸다. 진호가 경영하던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월급을 밀린 적 없었다. 자금이 빠듯할 때는 자기 월급을 줄였다.

김과장
"그리고... 검찰 쪽에서 연락 오지 않았어요?"
박진호
"안 왔는데."
김과장
"조만간 올 거예요. 최 대표 횡령 건에서 포괄위임장 관련 새로운 증거가 나왔대요. 위임장 날짜가 조작됐다는 거요."

날짜 조작.

포괄위임장. 3년 전에 사인한 거라고 했다. 그런데 날짜가 조작됐다? 그러면 — 진호가 사인한 시점과 실제 사용 시점이 다르다는 뜻이었다.

이게 밝혀지면 횡령의 주체가 바뀐다. 진호에서 승재로.

박진호
"...확실해?"
김과장
"회계팀 후배가 알려줬어요. 검찰에서 디지털 포렌식을 했는데, 문서 메타데이터에서 수정 이력이 나왔대요."

메타데이터. 디지털 포렌식.

진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포괄위임장은 워드 파일이었다. 승재가 프린트해서 가져왔다. 진호가 사인했다. 하지만 원본 파일은 승재 컴퓨터에 있었다.

파일을 수정하면 메타데이터에 기록이 남는다. 수정 날짜, 수정 횟수, 마지막 저장 시각.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 포렌식으로 복원된다.

승재가 날짜를 바꾼 거였다. 진호가 사인한 뒤에, 위임 범위를 넓히거나 날짜를 소급 적용하려고.

빌려준 서명으로 칼을 만든 것뿐 아니라 — 칼을 더 날카롭게 갈아놓은 거였다.

김과장
"진호 씨. 무고 혐의가 밝혀지면 가압류 풀릴 수도 있어요."

가압류. 동결된 자산. 아파트. 통장.

풀릴 수도 있다. '수도'. 확실하지 않다. 법은 느리다. 검찰이 움직여도 기소까지, 재판까지, 판결까지 — 1년은 걸린다.

기다릴 수 없었다. 기다리면서 삽을 잡을 수 없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을 계속해야 했다.

박진호
"고마워. 김 과장."
김과장
"과장 아닙니다. 퇴사했어요. 월급 안 나오는데 뭘."

진호가 멈췄다.

박진호
"...미안하다."
김과장
"대표님이 미안할 일 아니에요. 저도 알아요. 누가 잘못한 건지."

전화가 끊겼다.

진호는 편의점 앞에 서 있었다.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승재. 동남아 프로젝트. 4억 손실. 월급 체불. 직원 퇴사.

15년 동안 쌓은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진호가 세운 것이.

분노가 올라왔다. 5개월 만에. 해임당했을 때보다, 횡령 누명 쓸 때보다 — 직원 월급이 밀린다는 말에 분노가 올라왔다.

43명. 그 사람들의 가족까지 하면 100명이 넘는다. 그 사람들이 매달 받는 월급으로 집세를 내고, 아이 학원비를 내고, 부모 병원비를 냈다.

그걸 밀고 있다.

주먹을 쥐었다. 커피 컵이 찌그러졌다.

3초. 손을 폈다.

지금은 화낼 때가 아니었다. 화는 나중에. 지금은 만들 때였다.

고시원으로 돌아갔다. 노트북을 열었다.

100만 원. 아직 42만 원이 남았다.

10일 안에.

제16화 끝

제17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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