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95.
전화가 왔다. 02 국번. 5개월 전 심장이 멈출 뻔했던 그 국번.
이번엔 멈추지 않았다.
진행 상황. 고소 사건.
불기소.
기소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진호는 전화기를 잡은 손을 봤다. 떨리지 않았다.
5개월 전, 같은 전화를 받았을 때 심장이 빨라졌다. 손이 떨렸다. 횡령. 23억. 최승재.
지금은 — 고요했다. 올 줄 알았다. 김 과장이 알려줬다. 포렌식 결과가 나왔다고. 날짜 조작이 확인됐다고.
전화가 끊겼다.
가압류 해제. 동결됐던 자산이 풀린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
진호는 창밖을 봤다. 원룸 창문. 골목 너머로 하늘이 보였다. 파란 하늘. 고시원에서는 가로등밖에 안 보였는데.
승재. 문서 변조. 무고. 역고소.
빌려준 서명으로 만든 칼이 — 만든 사람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분노가 올라올 줄 알았다. 안 올라왔다. 대신 — 피곤함이 왔다. 5개월 동안 눌러놨던 감정이 풀리는 느낌. 주먹을 오래 쥐고 있다가 펴면 손이 아픈 것처럼.
단말기를 봤다.
인맥이 3 올랐다. 자금력이 5 올랐다.
숫자가 올라간 걸 보니 — 이상하게 실감이 났다. 검찰의 전화보다 숫자 3이 더 실감났다.
이 단말기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현실이 숫자로 변환되는 것에.
위험한 걸 수도 있었다. 현실을 게임처럼 보는 것.
아니면 — 게임처럼 보니까 현실을 견딜 수 있는 것일 수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
불기소는 끝이 아니었다. 시작이었다. 가압류가 풀리면 아파트 문제를 정리해야 했다. 부채를 갚아야 했다. 신용을 회복해야 했다.
그리고 — 승재를 만나야 했다.
Day 100.
승재에게서 연락이 왔다. 카카오톡.
'진호야,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
'진호야'. 다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진호 씨'가 아니라 '진호야'. 회의실에서는 '씨'였다. 지금은 '야'. 필요할 때 거리를 조절하는 사람이었다.
진호는 10분 동안 화면을 봤다. 답장을 안 했다.
단말기에 물었다.
진호가 원하는 것.
5개월 전에는 분명했다. 복수. 승재에게 당한 것을 되돌려주는 것.
지금은 — 덜 분명했다. 복수보다 중요한 게 생겼다. 사업. 지우. 매일 만들고 있는 것들.
만나지 않아도 됐다. 검찰이 알아서 한다. 법이 알아서 한다.
그런데 — 만나고 싶었다. 복수가 아니라.
확인하고 싶었다. 자기가 달라졌는지.
답장을 보냈다. "내일 저녁 8시. 장소 보내."
카페. 강남. 승재가 잡은 곳이었다. 비싼 카페. 커피 한 잔에 12,000원.
승재가 먼저 와 있었다. 양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 달랐다. 넥타이가 느슨했다. 얼굴이 말라 있었다. 눈 밑이 어두웠다.
진호가 앞에 앉았다.
5개월 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회의실이었다. '사물함 정리는 내일까지 해줘. 보안카드는 경비실에 반납하고.'
승재가 웃으려 했다. 안 됐다. 회의실에서는 편안하게 웃었는데 — 지금은 안 됐다.
아파트. 부채 정리. 가압류 해제.
5개월 전이었다면 — 고민했을 거다. 아니, 5개월 전에는 이런 제안 자체가 없었다. 승재가 이기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승재가 지고 있었다. 검찰이 움직였다. 포렌식이 나왔다. 문서 변조. 무고. 역고소. 회사 매출은 떨어지고, 직원은 나가고, 4억을 날렸다.
승재가 절실한 거였다. 합의가 필요한 쪽은 승재였다.
두 글자.
진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12,000원짜리 커피. 맛은 편의점 커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승재가 진호를 봤다. 3초. 5초. 표정이 바뀌었다. 회의실에서 보던 편안한 얼굴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불안한 얼굴.
승재가 입을 열었다. 뭔가 말하려다 닫았다.
진호가 승재를 봤다. 똑바로.
5개월 동안 한 번도 묻지 못한 질문이었다. 해임당한 날에도, 검찰 전화를 받았을 때도, 고시원 천장을 볼 때도.
왜. 15년을 같이 했는데. 왜.
승재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5초간 침묵.
진호가 멈췄다.
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맞았다. 변명이었다. 그런데 — 진짜이기도 했다.
진호는 일어섰다.
돌아서서 걸었다. 카페를 나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6개월 전 서초동 빌딩 회전문을 나왔을 때도 뒤를 안 돌아봤다.
그때는 돌아볼 곳이 없어서였다.
지금은 — 앞에 갈 곳이 있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