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9일. 서울가정법원.
건물이 컸다. 생각보다 컸다. 법원이라고 하면 드라마에 나오는 법정을 상상했는데, 가정법원은 달랐다. 복도가 넓고 조용했다. 소리가 울렸다. 구두 소리, 서류 넘기는 소리, 어딘가에서 아이 우는 소리.
진호는 3층 복도 끝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양복을 입었다. 유일하게 남은 양복.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 목이 졸리는 것 같아서.
조정실 문이 닫혀 있었다. 안에서 수진이 조정위원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진호 차례는 끝났다. 10분이었다. 조정위원이 물었다. "양육권에 대해 이의가 있으십니까." 진호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없습니다. 한 마디.
이의가 없는 게 아니었다. 지우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 지금 자기가 뭘 줄 수 있는지 생각하면, 없습니다가 맞았다.
통장이 동결돼 있었다. 집에 가압류가 붙어 있었다. 수입이 없었다. 주소지가 불안정했다. 형사 피의자 신분이었다.
조정위원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현재 상황을 고려하면, 모의 양육이 아동 복리에 적합하다고 판단됩니다."
아동 복리. 지우를 그렇게 불렀다. 아동. 내 딸인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전부였다.
조정이 끝났다. 1시간 반.
1시간 반 만에 12년이 정리됐다. 결혼 12년. 서류 몇 장. 도장 몇 개.
로비에서 수진을 봤다. 수진도 진호를 봤다. 둘 다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여기서 하면 안 되는 말들이었다.
수진이 먼저 걸었다. 정문 쪽으로.
지우가 로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교복을 입고 있었다. 중학교 교복. 입학한 지 일주일도 안 됐다. 교복이 컸다. 어깨가 좀 처져 있었다. 엄마가 크게 사준 거였다. "금방 클 거야." 수진이 그랬을 거다.
지우가 일어섰다. 진호를 봤다.
열두 살짜리 눈이었다. 뭘 알고 뭘 모르는지 구분이 안 되는 나이. 엄마 아빠가 왜 여기 있는지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었다.
그런데 표정을 보면 — 알고 있었다.
목소리가 나왔다. 다행이었다. 안 나올 줄 알았다.
아빠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디서 살 건지 정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갈 곳이 없었다. 집은 가압류 상태고, 다음 달이면 나가야 했다.
거짓말. 또.
수진이 돌아왔다. 지우의 손을 잡았다. 부드럽게. 당기지 않았다. 기다렸다.
지우가 수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두 걸음. 세 걸음. 정문 쪽으로. 유리문 너머로 겨울 햇살이 비쳤다.
지우가 멈췄다. 돌아봤다.
작은 목소리였다. 로비에 울렸다.
진호가 웃으려 했다. 입꼬리가 안 올라갔다. 얼굴 근육이 말을 안 들었다. 15년 동안 협상 테이블에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사람이, 열두 살 앞에서 얼굴이 무너지고 있었다.
대답해야 했다. '그럼'이라고. '당연하지'라고. '아빠가 꼭 갈게'라고.
목이 막혔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였다.
지우가 웃었다. 작은 웃음. 안심한 건지, 안심하려는 건지 모르겠는 웃음.
손을 흔들었다. 작은 손이었다.
교복 소매가 손등까지 내려와 있었다. 손가락 끝만 보였다. 그 손가락이 흔들렸다.
수진이 지우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한 계단. 두 계단. 지우가 한 번 더 돌아봤다. 진호가 끄덕였다. 또.
차가 있었다. 수진 아버지 차. 검은 세단. 뒷문이 열렸다. 지우가 탔다. 문이 닫혔다.
차가 움직였다. 골목을 돌았다. 왼쪽으로 꺾었다.
사라질 때까지 진호는 계단에 서 있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1월 바람이 불었다. 12월보다 차가웠다. 막을 생각을 안 했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10분. 아니 20분. 경비가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가 물러갔다.
괜찮지 않았다. 근데 괜찮다고 했다. 또 거짓말이었다.
오늘만 세 번째.
이틀 후. 진호는 짐을 쌌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캐리어 하나. 옷 네 벌. 세면도구. 충전기. 노트북. 지우가 유치원 때 그린 그림 — 액자에서 빼서 접어 넣었다.
아파트를 나왔다. 현관문을 닫았다. 잠그지 않았다. 이제 잠글 이유가 없었다.
부동산에 전화했다. "이번 달 말까지 빼겠습니다." 상대가 물었다. "사유가 뭡니까." "개인 사정입니다." 더 묻지 않았다.
고시원을 찾았다. 서울 외곽. 2호선 끝자락. 월 35만 원. 보증금 20만 원.
남은 현금 55만 원. 보증금 내고 나면 20만 원.
방을 봤다. 2평. 침대 하나. 책상 없음. 옷장 대신 벽에 걸 수 있는 못 세 개. 창문은 있었다. 열리지 않았다. 방음은 안 됐다. 옆방에서 TV 소리가 들렸다.
앞에 연매출 200억짜리 회사의 대표이사 사무실이 있었다. 12층. 통유리. 남산 뷰. 이제 2평짜리 고시원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캐리어를 열었다. 옷 네 벌을 못에 걸었다. 세면도구를 선반에 올렸다.
정리 끝. 3분.
침대에 앉았다. 천장을 봤다. 물때 자국이 있었다. 누런 얼룩.
서초동 천장은 하얬다. 3미터. 아파트 천장은 2.4미터. 여기는 2미터. 내려갈수록 천장이 낮아졌다.
이불을 뒤집어썼다. 눈을 감았다.
일주일이 지났다.
아무것도 안 했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고, 고시원 방에 누워 천장을 봤다. 그게 하루였다. 매일.
지우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가정법원 로비. 교복 소매에 가려진 작은 손. '아빠, 나 데리러 올 거지?'
끄덕였다. 분명히 끄덕였다. 약속이었다.
그런데 지금 뭘 하고 있나. 고시원 천장만 보고 있다. 남은 돈 12만 원. 다음 달 월세 35만 원. 23만 원이 모자랐다.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확실했다.
데리러 가겠다고 끄덕였으니까.
새벽 5시. 인력사무소.
인터넷으로 찾았다. '당일 일당 지급 건설현장.' 검색하면 나왔다. 전화 한 통. "내일 새벽에 오세요." 그게 전부였다.
형광등이 지직거렸다. 벤치에 남자 열다섯 명 정도가 앉아 있었다. 안전모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사람, 담배를 피우는 사람, 눈을 감고 있는 사람.
진호는 줄 끝에 섰다.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어제 편의점 옆 옷가게에서 샀다. 15,000원. 허리가 좀 컸다. 벨트가 없어서 접어 넣었다.
접수 창구에서 이름을 적었다. 박진호. 주민번호. 연락처. 경력란에 '없음'이라고 썼다.
없음. 15년간 회사를 경영한 사람이. 직원 43명을 먹여살린 사람이. 경력란에 '없음'.
웃음이 났다. 소리 없는 웃음. 옆에 있던 남자가 흘깃 봤다. 진호가 표정을 지웠다.
이름이 불렸다. 진호가 일어섰다.
봉고차 뒤에 탔다. 안전모를 받았다. 파란색. 글씨가 벗겨져 있었다.
차가 출발했다. 창밖으로 새벽 서울이 지나갔다. 가로등. 빈 도로. 편의점 불빛. 이른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시간에 움직이는 건 택시와 트럭과 봉고차 뒤에 탄 사람들뿐이었다.
옆에 앉은 남자가 코를 골았다.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머리가 흔들렸다.
진호는 잠이 오지 않았다. 손을 봤다. 볼펜을 잡던 손. 계약서에 사인하던 손. 악수하던 손.
현장에 도착했다. 주상복합 신축 공사. 철근이 하늘을 찔렀다.
반장이 소리쳤다. "신참! 안전모 제대로 써! 턱끈 채워!"
진호가 턱끈을 채웠다. 삽을 받았다.
200억짜리 계약서에 사인하던 손으로 삽을 잡았다.
무거웠다. 삽이 아니라 — 전부가.
그래도 잡았다. 놓으면 안 됐다.
작은 손이 흔들리던 게 떠올랐다.
놓으면 안 됐다.
3개월이 지났다.
하루도 안 빠졌다. 새벽 5시에 일어나고, 5시 40분에 인력사무소에 도착하고, 6시에 봉고차에 타고, 7시에 삽을 잡고, 6시에 놓고, 7시에 고시원에 돌아왔다.
매일. 90일.
몸이 바뀌었다. 어깨가 넓어졌다. 손에 굳은살이 박혔다. 볼펜을 잡던 자리에. 악수하던 손바닥 가운데에. 물집이 잡히고 터지고 굳어지기를 세 번 반복하니까, 이제 삽자루가 아프지 않았다.
몸만 바뀐 게 아니었다.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처음 한 달은 삽을 잡으면 서초동이 떠올랐다. 승재 얼굴이. 회의실이. 댓글이. 두 달째부터 안 떠올랐다. 삽이 무거우면 삽만 생각했다. 벽돌이 무거우면 벽돌만 생각했다.
단순해졌다. 단순해지는 게 무서웠는데, 어느 순간 편해졌다.
마포 현장이 끝나고 강서 현장으로 바뀌었다. 반장이 바뀌었다.
오영수. 현장 반장. 키 작고 어깨 넓다. 허리에 보호대를 감고 있었다. 목소리가 현장 끝까지 울렸다.
진호를 보고 소리쳤다. 첫날이었다. 벽돌을 한 번에 여섯 장 들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한 장에 3.5킬로. 스물한 킬로.
영수가 자기 허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보호대가 작업복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투박했다. 욕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나쁘지 않았다.
3개월 동안 아무도 진호의 몸을 걱정한 적 없었다. 인력사무소 직원은 이름만 불렀고, 다른 인부들은 각자 삽을 잡았고, 고시원 주인은 월세 날짜만 물었다.
영수가 처음이었다. 허리 나간다고. 네 장만 들라고. 다치면 일당도 못 받는다고.
걱정이 아닐 수도 있었다. 다치면 현장이 귀찮아지니까. 그래도 —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점심. 현장 한쪽 그늘에서 도시락을 펼쳤다. 삼각김밥 두 개. 편의점에서 1,800원.
영수가 옆에 앉았다. 초대받지 않았는데 자연스러웠다. 보온병에서 국물을 따라 진호에게 밀었다.
미역국이 따뜻했다. 소고기 미역국. 국물이 진했다. 오래간만에 집밥 냄새를 맡았다. 수진이 끓이던 된장찌개가 떠올랐다. 떠오르면 안 되는데, 국물 냄새가 기억을 불렀다.
영수가 진호를 흘깃 봤다.
진호가 자기 손을 봤다. 굳은살이 잡혀 있었지만, 손가락이 길었다. 관절이 굵지 않았다. 볼펜을 잡던 손.
영수가 국물을 홀짝였다. 5초쯤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진호가 영수를 봤다. 영수는 현장을 보고 있었다. 진호를 안 봤다. 일부러 안 본 거였다.
영수가 보온병 뚜껑을 닫았다.
진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데를 보고 있었나. 몰랐다. 삽만 잡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영수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돌아보지 않고.
진호는 미역국 뚜껑을 닫았다. 손이 멈췄다.
돌아갈 데. 어디로.
지우 얼굴이 떠올랐다. 가정법원 계단. 작은 손.
아직 돌아갈 곳은 없었다. 하지만 돌아가야 할 사람은 있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 2호선. 퇴근 시간이 지나서 좌석이 비어 있었다. 진호는 끝자리에 앉았다. 안전모가 들어 있는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놨다.
스크린도어 앞에서 내릴 준비를 할 때였다.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AI로 새롭게 시작하세요. 천만원만 투자하세요.'
짙은 남색 바탕에 흰 글씨. 회사명이 없었다. 브랜드도, 로고도 없었다. 문구와 전화번호. 그것뿐.
콧방귀를 꼈다. 2025년이다. ChatGPT가 무료인 세상에 AI에 천만 원? 사기다.
지나쳤다.
다음 날.
버스 정류장. 인력사무소로 가는 새벽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류장 광고판. 같은 광고. 짙은 남색. 흰 글씨. 같은 문구. 같은 번호.
눈을 비볐다. 어제 지하철에서 본 거랑 같았다. 우연이겠지.
그 다음 날. 공사장 가는 골목. 전봇대에 붙은 전단. 같은 문구. 같은 번호.
그 다음 날. 편의점 유리창. 같은 광고.
그 다음 날. 고시원 엘리베이터 안.
일주일을 매일 봤다.
어딜 가든 그 광고가 먼저 와 있었다.
이상한 건 따로 있었다. 누가 그 광고를 붙이는 건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편의점 유리창에 어제까지 없던 스티커가 아침에 붙어 있고, 고시원 엘리베이터에 어제까지 없던 전단이 꽂혀 있었다.
주인에게 물어봤다.
주인이 확인하러 갔다. 엘리베이터 안에 전단이 없었다.
분명 아침에 봤다. 짙은 남색. 흰 글씨. 천만원. 전화번호.
없었다.
밤이었다. 고시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통장을 확인했다. 잔고 1,043만 원. 3개월간 일당 12만 원, 하루도 안 빠지고 90일. 1,080만 원. 고시원비와 생활비 빼면 이만큼 남았다.
천만 원.
광고가 말한 숫자와 같았다. 우연이었다. 우연이어야 했다.
전화번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외운 적이 없었다. 외워져 있었다. 일주일 동안 매일 봤으니까. 숫자가 눈에 박혀 있었다.
뭔가가 끌렸다. 설명이 안 됐다.
무료 AI가 넘치는 세상에서, 회사명도 없는 광고가, 천만 원을 달라고, 자기만 따라다닌다.
사기가 확실했다.
확실한데 —
영수 반장의 말이 떠올랐다. '여기 오래 있으면 못 돌아가.'
맞았다. 3개월째 삽을 잡고 있다. 한 달에 300만 원. 1년이면 3,600만 원. 부채 3억. 갚는 데 10년. 10년 뒤에 진호는 쉰둘이고 지우는 스물셋이다.
데리러 가겠다고 끄덕였다. 10년 뒤면 너무 늦다.
이 속도로는 안 된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었다. 90일 동안 벽돌을 나르면서 배운 거였다. 벽돌은 정직하다. 한 장에 3.5킬로. 백 장을 나르면 350킬로. 천 장을 나르면 3,500킬로.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인생도 그랬다. 일당 12만 원.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이 경로에는 지름길이 없었다.
그런데 — 다른 경로가 있다면?
사기일 확률이 99%였다. 하지만 지금 경로의 확률은 0%였다. 이대로 가면 지우한테 못 돌아간다.
99% 사기. 1% 뭔가.
천장을 봤다. 누런 물때. 가로등 빛. 옆방 TV 소리.
지우가 떠올랐다. 작은 손.
눈을 감았다.
전화번호가 어둠 속에 떠올랐다. 선명하게. 한 자리도 안 흔들리고.
이불을 걷었다.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화면이 켜졌다.
아직 누르지 않았다.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