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14분.
핸드폰 화면이 켜져 있었다. 전화번호 입력창. 숫자 열한 자리가 찍혀 있었다. 외운 적 없는 번호. 일주일 동안 눈에 박혀서 저절로 외워진 번호.
엄지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 있었다. 누르지 않았다. 3분째.
머릿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싸우고 있었다.
하나는 15년 동안 사업을 해온 목소리였다. 회사명도 없는 광고. 전화번호만 있는 전단. 천만 원. 전형적인 사기 패턴이다. 대출 사기, 투자 사기, 코인 사기 — 전부 이런 식이다. 끊어.
다른 하나는 — 설명이 안 되는 목소리였다. 광고가 자기만 따라다닌다. 고시원 엘리베이터에 있다가 사라졌다. 통장 잔고가 딱 천만 원이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많은 우연이다.
그리고 영수의 말. '여기 오래 있으면 못 돌아가.'
그리고 지우의 말. '아빠, 나 데리러 올 거지?'
진호는 눈을 감았다. 3초. 떴다.
사업가의 머리로 정리했다.
현재 경로: 일당 12만 원. 부채 3억. 소요 시간 10년. 지우 스물셋. 결과 — 실패.
대안 경로: 천만 원 투자. 실패 시 잔고 0원. 성공 시 — 모른다. 하지만 0이 아닌 뭔가.
기대값을 계산했다. 현재 경로의 기대값은 0이었다. 10년 뒤에 빚을 갚아도 지우는 이미 어른이다. 데리러 간다는 약속은 의미가 없어진다.
천만 원을 걸면. 99% 확률로 0원이 된다. 1% 확률로 뭔가가 된다.
0 × 0.99 + X × 0.01.
X가 뭔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 경로의 기대값이 0인 이상 — 1%짜리 X가 뭐든 간에, 거는 게 맞았다.
이미 바닥이니까. 바닥에서는 어떤 도박이든 기대값이 양수다.
눌렀다.
신호가 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새벽 2시에 전화를 받을 리가 없었다. 사기라면 ARS가 나오거나, 결번이거나 —
받았다.
여자 음성이었다. 차분했다. 기계 같지는 않았다. 사람 같지도 않았다. 그 사이 어딘가.
인사가 없었다. 회사명도 없었다. 신청하겠느냐. 그것만.
같은 말. 억양까지 같았다. 녹음이 아니었다. 진호가 말한 뒤에 응답했으니까. 그런데 기계적이었다.
3초간 침묵.
진호의 눈이 좁아졌다. 15년 동안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이었다. 정보를 안 주는 건 두 가지 경우다. 숨기는 게 있거나, 설명할 수 없거나.
머리는 끊으라고 했다. 입이 계좌번호를 요구했다. 손은 이미 메모장을 열고 있었다.
숫자를 받아 적었다. 예금주명을 물었다.
전화가 끊겼다. 상대가 끊은 게 아니었다. 통화가 그냥 — 끝났다. 신호음도 없이.
진호는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통화 기록. 0분 47초.
47초 동안 계좌번호를 받았다. 설명은 없었다. 회사명도 없었다. 예금주도 없었다.
사기가 확실했다. 200% 확실했다.
뱅킹 앱을 열었다.
잔고 10,430,000원.
이체 금액 입력. 10,000,000원.
수취인 계좌번호 입력. 적었던 숫자를 하나씩 눌렀다.
예금주 확인. 화면에 글자가 떴다.
'(주)없음'
없음. 예금주가 '없음'이었다. 회사명이 '없음'. 존재하지 않는 회사. 검색하면 안 나올 회사.
진호는 웃었다. 한참을 웃었다. 소리 없이. 어이가 없어서.
예금주가 '없음'인 계좌에 천만 원을 보내려 하고 있다. 3개월 동안 하루도 안 쉬고 벽돌을 날라서 모은 돈. 전부. 손에 굳은살이 박히고, 어깨가 쑤시고, 새벽에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될 때까지 번 돈.
이걸 보내면 잔고 43만 원. 다음 달 월세 35만 원 내면 8만 원. 이틀치 밥값.
미친 짓이었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 지우 얼굴이 떠올랐다.
교복 소매에 가려진 작은 손. '아빠, 나 데리러 올 거지?'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약속이었다.
지금 경로로는 약속을 지킬 수 없다. 그건 3개월 동안 증명됐다.
다른 경로가 사기일 확률 99%. 하지만 이 경로의 확률은 100% 실패.
엄지가 떨렸다.
이체 버튼 위에 멈췄다. 1초. 2초.
승재가 떠올랐다. "경영은 숫자야." 맞다. 숫자다. 0% vs 1%. 답은 1%다. 사업가라면 — 어떤 사업가라도 — 0%보다 1%를 고른다.
눌렀다.
'이체가 완료되었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잔고 430,000원.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누르기 전엔 안 떨렸다. 누른 다음에 떨렸다. 결정의 무게가 사후에 왔다.
소리 내어 말했다. 확인하듯이. 자기 자신에게.
핸드폰을 침대에 내려놨다. 천장을 봤다. 누런 물때.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사기당한 게 확정될 거다. 문자 하나 안 올 거다. 택배도 안 올 거다. 전화번호는 결번이 돼 있을 거다.
그러면 잔고 43만 원으로 다시 삽을 잡아야 한다. 처음부터.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시계가 3시를 지나고. 4시를 지나고.
그런데 — 이상하게 — 후회는 없었다.
3개월 동안 삽을 잡으면서 알게 된 게 있었다. 후회는 안 한 것에서 온다. 한 것에서는 안 온다. 결과가 나빠도.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한 미친 짓이었다.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나았다.
눈을 감았다.
이번엔 잠이 왔다.
이틀이 지났다.
문자는 오지 않았다. 전화도 없었다. 예상대로였다. 사기. 천만 원 증발. 끝.
새벽에 인력사무소에 갔다. 삽을 잡았다. 벽돌을 날랐다. 일당 12만 원을 받았다. 다시 처음부터.
둘째 날 저녁. 고시원에 돌아왔다. 방 문 앞에 뭔가가 있었다.
택배. 작은 상자. 손바닥 두 개 크기. 흰색. 송장이 붙어 있었다.
수취인: 박진호. 주소는 맞았다. 발송인 — 빈칸.
진호는 상자를 집어들었다. 가벼웠다. 비어 있는 줄 알았다. 흔들어봤다. 안에서 뭔가가 미끄러지는 느낌이 있었다. 무게가 없다시피 했다.
방에 들어왔다. 침대 위에 상자를 올려놨다. 한참을 봤다.
열었다.
안에 검은 단말기 하나.
손바닥 크기. 모서리가 둥글었다. 화면은 꺼져 있었다. 뒷면에 아무것도 없었다. 제조사 로고 없음. 모델명 없음. 인증 마크 없음.
설명서 없음. 충전기 없음.
버튼 하나. 오른쪽 측면. 전원.
무게가 틀렸다. 이 크기에서 이 가벼움은 — 스마트폰보다 가벼웠다. 빈 껍데기 같았다. 그런데 화면이 있었고, 버튼이 있었다.
웃음이 터졌다. 한참을 웃었다. 소리 내서 웃었다. 옆방에서 벽을 두드렸다. 신경 안 썼다.
그러다 멈췄다.
잔고 43만 원. 내일 라면값도 빠듯하다. 천만 원을 날렸다. 최승재에게 당하고, 검찰에 당하고, 세상에 당하고, 이제 이름도 없는 사기꾼한테 또 당했다.
단말기를 바닥에 내려놨다.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지우가 떠올랐다. 가정법원 계단. 작은 손. 아빠, 나 데리러 올 거지?
눈을 떴다.
단말기를 집어들었다. 천만 원어치다. 전원이라도 넣어봐야 했다.
사기면 사기인 거 확인하고 — 아니면.
아니면 뭔데.
모르겠다. 미친 척이었다.
전원 버튼을 눌렀다.
1초. 아무것도 없었다.
2초.
3초째 —
화면이 켜졌다.
검은 바탕에 파란 빛이 번졌다. 좁은 고시원 방 전체가 그 빛으로 잠겼다. 벽지의 얼룩이, 천장의 물때가, 못에 걸린 작업복이 — 전부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글자가 떠올랐다. 한 줄씩.
진호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사용자 스캔. 퍼센트가 올라가고 있었다. 31, 47, 68, 89 —
진호의 손이 멈췄다.
이름. 생년월일. 글로벌트레이드. 대표이사. 해임.
전부 맞았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천만 원짜리 사기 단말기가 자기 이름을 알고 있었다. 회사 이름을. 해임당한 것까지.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뉴스. 검색하면 나온다. '200억 매출 대표, 횡령 퇴진.' 이름, 회사, 해임 — 기사에 다 있다.
말하고 나니 그럴듯했다. AI라면 인터넷 기사를 긁어서 신원을 파악하는 건 가능하다. 2025년이니까.
그런데 생년월일은 기사에 안 나왔다.
생각을 접었다. 화면이 바뀌고 있었다.
숫자가 눈에 박혔다.
보유 자산 43만 원. 부채 3억 1,200만 원. 순자산 마이너스 3억 1,157만 원.
맞았다. 정확했다. 이체 후 잔고까지 반영돼 있었다.
그보다 — 기술력 58, 영업력 76.
근거가 뭔데. 이 단말기가 무슨 수로 자기 기술력과 영업력을 수치로 매기는 건데.
미쳤다는 건 단말기에게 하는 말이었다. 자기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화면이 바뀌었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입력창.
AI 팀장. CEO. 사업 재건.
사기가 확실했다. 정교한 사기. 뉴스를 크롤링해서 타겟을 특정하고, 실패한 CEO에게 희망을 팔아먹는 수법. 천만 원은 이미 날린 돈이고.
그런데 끌 수가 없었다. 파란 화면이 어두운 고시원 방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었다.
일당 120,000원. 고시원 보증금 200,000원. 횡령 무고 관련 가압류.
일당 액수까지. 보증금까지. 무고라는 단어까지.
3초간 커서가 깜빡거렸다. 답이 올라왔다.
답을 안 한 거였다.
진호의 눈이 좁아졌다. 질문을 피하는 건 숨기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기계가 뭘 숨겨.
넘어갔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진호의 눈이 멈췄다.
'당신이 잃은 것은 돈과 사람입니다. 당신 자체는 잃지 않았습니다.'
기계가 한 말이었다. 위로가 아니라 분석이었다. 그런데 — 4개월 동안 아무도 해주지 않은 말이었다.
뉴스 댓글은 사기꾼이라고 했다. 장인은 딸을 데리고 나오라고 했다. 수진은 미안하다고 했다. 영수는 돌아가라고 했다. 공사장 사람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도 — 네가 아직 쓸모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기계가 했다. 감정 없이. 데이터로.
그게 오히려 믿을 수 있었다. 기계니까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다.
목이 뜨거웠다.
울면 안 됐다. 기계 앞에서 울면 진짜 미친놈이었다.
눈을 감았다. 3초. 다시 떴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질문은 정확했다. 15년 동안 사업을 해온 사람의 질문이었다.
초기 자본 0원. 세 개 모두.
진호의 머릿속에서 계산이 돌았다. 15년 동안 버릇처럼 해온 계산.
리스크: 0. 기회비용: 시간. 업사이드: 미지수.
나쁜 딜이 아니었다. 사기라 해도, 여기서부터는 잃을 게 없는 구간이었다.
화면이 바뀌었다.
7일 안에 첫 수익.
진호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커서가 깜빡거렸다.
Y를 누르면 뭔가가 시작된다. N을 누르면 43만 원짜리 인생으로 돌아간다.
머릿속에서 영수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기 오래 있으면 못 돌아가.'
지우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빠, 나 데리러 올 거지?'
그리고 기계의 문장이 떠올랐다. '당신 자체는 잃지 않았습니다.'
진호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 멈췄다.
Y.
눌렀다.
파란 빛이 한 번 깜빡였다. 방 전체가 명멸했다. 그리고 다시 켜졌다.
진호는 단말기를 들고 일어섰다.
창밖을 봤다. 동이 트고 있었다. 고시원 창문 너머로 회색 하늘이 밝아지고 있었다. 새벽 5시가 넘었다.
인력사무소에 갈 시간이었다. 그런데 —
오늘은 가지 않을 거였다.
처음으로, 삽 대신 다른 걸 잡았다.
파란 빛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바닥이었다. 여전히 바닥이었다.
하지만 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 모든 방향이 위였다.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