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10분. 알람이 울렸다. 매일 이 시간에 일어났다. 90일 동안.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진호는 알람을 껐다. 일어나서 작업복을 봤다. 못에 걸린 작업복. 안전모는 가방 안에 있었다.
오늘은 입지 않았다.
대신 단말기를 집어들었다. 파란 화면이 켜져 있었다. 밤새 꺼지지 않았다. 배터리 표시가 없었다. 충전기도 없는 단말기가 밤새 켜져 있었다. 이상한 건 이제 하나 더 추가됐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화면에 글자가 떠 있었다.
첫 번째 지시를 내려달라. 기계가 사람에게 지시를 요청하고 있었다.
진호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뭘 지시하지. CEO라고 부르는데 회사가 없다. 직원이 없다. 사무실이 없다. 있는 건 고시원 2평, 노트북 하나, 잔고 43만 원, 그리고 이 단말기.
진호는 로드맵을 읽었다. 두 번 읽었다.
15년 동안 사업 계획서를 수백 개 봤다. 투자 유치 IR, 분기별 전략 보고서, 신사업 제안서. 좋은 계획과 나쁜 계획을 구분하는 눈이 있었다.
이건 — 나쁘지 않았다. 단계가 명확하고, 각 단계의 산출물이 구체적이었다. '확장'이나 '시너지' 같은 허황된 단어가 없었다. 숫자와 행동만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진호는 캐리어 아래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3개월 동안 한 번도 안 열었다. 충전이 죽어 있었다.
충전기를 꽂았다. 전원을 넣었다. 부팅.
화면이 켜졌다. 윈도우 바탕화면. 배경이 남산 사진이었다. 서초동 사무실에서 찍은 거였다. 12층에서 내려다본 남산.
3초 동안 봤다. 바탕화면을 기본 이미지로 바꿨다. 파란색 기본 배경.
과거를 지운 게 아니었다. 지금은 볼 필요가 없어서.
단말기 화면이 바뀌었다.
이전 이름과 연결되지 않는 것.
박진호. 뉴스에 나온 이름. '200억 매출 대표, 횡령 퇴진.' 그 이름으로는 안 된다. 검색하면 기사가 뜬다. 댓글 847개가 뜬다. 사기꾼, 도둑놈, 쓰레기.
새 이름이 필요했다.
단말기가 답하지 않았다. 커서만 깜빡거렸다. 이건 AI가 정해줄 영역이 아니었다. CEO가 정하는 거였다.
진호는 천장을 봤다. 누런 물때. 2평짜리 고시원. 바닥.
바닥에서 시작한다. 공장처럼. 원자재를 넣으면 제품이 나오는 곳. 아무것도 없는 데서 뭔가를 만드는 곳.
중얼거렸다. 단말기 이름이 FACTORY SYSTEM이었다. 우연이었다. 아니, 우연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이메일을 만들었다.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 이름을 정했다. 프로필 사진은 나중에.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사업자 등록. 여기서 멈췄다.
진호의 눈이 커졌다. 맞았다. 동결된 건 글로벌트레이드 법인 계좌였다. 개인 사업자는 새로 등록할 수 있었다. 15년 동안 법인만 운영해서 잊고 있었다. 개인사업자 등록은 — 간단했다.
이 AI가 법적 구조를 이해하고 있었다. 법인과 개인의 차이를. 동결 범위를. 사기 프로그램이 이런 걸 알 리가 없었다.
아니면 — 정교한 사기라서 이런 것까지 학습한 건가.
모르겠다. 지금은 쓸 수 있으면 쓰는 거였다.
오후 3시. 8시간이 지났다.
고시원 방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갔다. 삼각김밥 두 개를 먹었다. 물을 세 번 마셨다. 화장실을 두 번 갔다. 나머지 시간은 전부 노트북 앞이었다.
이메일 생성 완료. 유튜브 채널 생성 완료. 스마트스토어 간이사업자 등록 신청 완료 — 처리에 2~3일 소요. 도메인 하나 구매 완료. 7,000원.
잔고 43만 원에서 42만 3천 원.
단말기가 매 단계마다 지시를 보냈다. "다음: 유튜브 채널 설명란을 작성하십시오." "다음: 스마트스토어 대표자 정보를 입력하십시오." 하나를 끝내면 다음이 왔다. 멈추지 않았다.
진호도 멈추지 않았다. 3개월 동안 삽을 잡으며 익힌 게 있었다. 멈추지 않는 것. 생각하지 않는 것. 눈앞의 벽돌을 나르는 것. 지금은 벽돌 대신 계정을 만들고 있었다. 같았다. 하나 끝내면 다음. 다음.
저녁이 됐다. 고시원 복도에서 라면 냄새가 났다. 배가 고팠다.
단말기 화면을 봤다.
8시간 32분.
3개월 동안 매일 12시간씩 벽돌을 날랐다. 오늘은 8시간 동안 계정을 만들었다. 벽돌보다 가벼웠다. 어깨가 안 아팠다. 무릎이 안 떨렸다.
그런데 — 이상하게 — 벽돌 나를 때보다 피곤하지 않았다. 머리가 돌아가고 있었다. 3개월 동안 멈춰 있던 무언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15년 동안 매일 했던 일이었다.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 몸이 아니라 머리를 쓰는 것. 진호의 근육은 여기에 있었다. 삽을 잡는 손이 아니라, 키보드를 치는 손에.
영수 반장이 말했다. '여기 오래 있을 사람은 아닌 거 같다. 눈이 달라.'
맞았다. 이쪽이었다. 처음부터.
진호는 단말기를 내려다봤다.
누구에게 들려주고 싶은지.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노트북을 닫았다. 라면을 끓이러 갔다.
복도 형광등 아래서 라면을 먹으며 생각했다. 내일 음악을 만든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한 적 없는 일이다. 악기를 다룰 줄 모른다. 악보를 읽을 줄 모른다.
그런데 기계가 만든다고 했다. CEO는 방향만 정하면 된다고.
방향.
진호는 라면 국물을 마시며 창밖을 봤다. 고시원 복도 창문. 가로등 하나. 골목.
방향은 알고 있었다.
위.
Day 3. 아침 7시.
단말기 화면이 바뀌어 있었다.
어떤 노래.
어젯밤 라면을 먹으며 생각했다. 누구에게 들려주고 싶은지. 답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노래로 만드는 건 다른 문제였다.
10분.
진호는 화면을 두 번 봤다. 10분에 곡 하나. 스튜디오 없이. 악기 없이. 목소리 없이.
단말기가 링크를 하나 보냈다. 노트북 브라우저로 열었다. AI 음악 생성 플랫폼. 영어 인터페이스. 가운데 입력창 하나.
프롬프트를 넣으면 노래가 나온다.
진호는 입력창을 봤다. 커서가 깜빡거렸다. 단말기의 커서와 같았다.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하는 것.
진호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3개월 만에 키보드를 치는 손이었다.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어색했다.
썼다.
"Korean ballad. Piano and strings. A man who lost everything. Starting from the bottom. He made a promise to someone small. He will keep it."
someone small. 작은 사람. 지우.
엔터를 눌렀다.
로딩. 화면에 진행 바가 움직였다. 10초. 20초. 30초.
진호는 화면을 봤다. 이게 진짜 되나. 텍스트 몇 줄 넣었는데 노래가 나온다고?
1분 12초.
재생 버튼이 나타났다.
눌렀다.
피아노가 먼저 나왔다. 낮은 음. 천천히. 한 음씩.
현악기가 들어왔다. 바이올린인지 첼로인지 모르겠다. 진호는 악기를 모른다. 그런데 — 소리가 맞았다. 프롬프트에 쓴 분위기와.
보컬이 나왔다. 한국어. 남자 목소리. 진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AI가 만든 목소리였다. 그런데 —
가사가.
'바닥에 선 아침, 차가운 벽을 등지고 / 잃어버린 이름 위에 새로운 길을 놓는다'
진호는 눈을 감았다.
고시원 2평짜리 방에서, 3,000원짜리 편의점 헤드폰을 끼고, AI가 만든 노래를 듣고 있었다. 4개월 전에는 서초동 12층에서 남산을 내려다보며 커피를 마시던 사람이.
노래는 3분 24초였다. 끝까지 들었다.
끝나고 2초 동안 아무것도 안 했다. 헤드폰을 벗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1분 12초 만에 만들어진 노래였다. 텍스트 두 줄로. 악기를 못 다루는 사람이.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그런데 — 노래였다. 분명히 노래였다. 사람이 만든 것처럼 들리는지는 모르겠다. 전문가가 들으면 AI라고 알아챌 수도 있다. 하지만 진호에게는 — 뭔가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3개월 동안 벽돌을 날랐다. 벽돌은 다른 사람의 건물이었다. 오늘 — 처음으로 자기 것을 만들었다.
멈췄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그날 진호는 7곡을 만들었다.
발라드 2곡. K-pop 2곡. 힙합 1곡. 어쿠스틱 1곡. EDM 1곡.
장르를 바꿔봤다. 분위기를 바꿔봤다. 영어 가사도 넣어봤다. 일본어도 시도했다. 프롬프트를 길게 쓰면 달라지는지 확인했다. 짧게 쓰면 어떤지도.
사업가의 습관이었다. 한 번에 이해하지 않는다. 변수를 바꿔가며 결과를 본다. 입력을 바꾸면 출력이 달라지는지 확인한다. 15년 동안 해온 방식이었다. 시장 조사, 가격 테스트, 샘플 오더 — 전부 같은 원리.
7곡 중 쓸 만한 건 3곡이었다. 나머지 4곡은 버렸다. 괜찮았다. 성공률 43%. 사업에서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
단말기가 물었다.
카메라가 필요 없다. 얼굴을 안 드러내도 된다.
그게 — 생각보다 중요했다. 박진호의 얼굴이 나가면 안 됐다. 검색하면 기사가 뜬다. 뉴스 댓글이 뜬다. 얼굴 없이 할 수 있다는 건 — 과거와 분리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저녁 9시.
커버 이미지 3장을 AI로 만들었다. 어두운 배경에 피아노 건반, 도시 야경, 새벽 하늘. 프롬프트 넣으면 10초 만에 나왔다. 음악만큼 빨랐다.
무료 영상 편집 도구로 이미지 위에 음악을 얹었다. 단말기가 단계별로 안내했다. "이 버튼을 누르십시오." "해상도를 1080p로 설정하십시오." "내보내기."
영상 3개. MP4 파일. 바탕화면에 놓였다.
유튜브 업로드 페이지를 열었다. 파일을 끌어다 놓았다.
업로드 중... 37%... 68%... 100%.
'동영상이 게시되었습니다.'
조회수 0. 0. 0.
당연했다. 구독자 0명 채널에 올린 영상.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안 본다.
그런데 — 존재했다. 인터넷 어딘가에 진호가 만든 것이 존재했다. 검색하면 나올 수 있었다. 누군가가 클릭하면 들을 수 있었다.
3개월 동안 날랐던 벽돌은 다른 사람의 건물이었다. 벽돌을 아무리 많이 날라도 진호의 이름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오늘 만든 건 달랐다. 조회수가 0이어도, 그건 진호의 것이었다.
밤 11시. 고시원 침대에 누웠다.
단말기를 봤다.
14시간 8분.
벽돌 나르는 것보다 오래 일했다. 그런데 몸이 안 아팠다. 어깨가 안 쑤셨다. 무릎이 안 떨렸다.
대신 머리가 돌아가고 있었다. 자기 전인데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내일 홈페이지. 어떤 구조로. 어떤 디자인으로. 웹소설을 어떻게 올리지. 음악도 같이 넣을 수 있나.
3개월 만에 처음이었다. 잠들기 전에 내일이 기대되는 것.
고시원 천장을 봤다. 누런 물때. 가로등 빛.
같은 천장이었다. 어젯밤에도 봤다. 그저께도. 90일 동안.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천장이 아니라 천장 너머를 보고 있었다.
핸드폰을 열었다. 유튜브 앱. 내 채널.
조회수. 0. 0. 0.
웃었다. 0이 맞았다. 시작은 항상 0이다.
15년 전에도 0에서 시작했다. 구로디지털단지 반지하. 고객 0명. 매출 0원. 거기서 200억까지 갔다.
또 0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 삽이 아니라 키보드를 잡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AI와 함께였다. 그리고 15년의 경험이 아직 손에 있었다.
기계가 말했다. 당신 자체는 잃지 않았다고.
맞았다.
눈을 감았다. 오늘은 잠이 올 것 같았다.
내일은 홈페이지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