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오전 9시.
단말기가 지시를 보냈다.
진호는 생각했다. 홈페이지에 뭘 담지.
음악이 있었다. 유튜브에 올린 3곡. 웹소설을 쓸 거였다. 그리고 — 나중에 스마트스토어와 연결할 수도 있었다.
단말기 화면에 코드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빠르게. 줄 단위가 아니라 블록 단위로. HTML, CSS, JavaScript — 진호가 이름만 아는 것들이었다.
15년 동안 IT팀에게 "이렇게 만들어줘"라고 지시만 했다. 코드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아니, 볼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달랐다. IT팀이 없었다. AI가 코드를 써주지만, 그걸 어디에 올려야 하는지는 진호가 알아야 했다.
커피 한 잔. 서초동에서는 매일 아메리카노 두 잔을 마셨다. 8,000원. 생각도 안 하고 썼다.
지금은 6,500원이 크다. 잔고 42만 원. 하지만 — 사업을 하려면 인프라가 필요했다. 15년 전에도 사무실 보증금을 내고 시작했다. 이건 그것보다 싸다.
오후 2시.
VPS를 신청했다. 해외 서비스. 영어. 단말기가 하나씩 안내했다. "이 버튼을 누르십시오." "서버 위치는 서울을 선택하십시오." "운영체제는 Ubuntu를 선택하십시오."
서버가 생겼다. IP 주소가 나왔다. 숫자 네 묶음. 이게 서버의 주소라고 했다.
다음 단계. 도메인을 서버에 연결.
DNS. A 레코드. 단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건 알겠다. 문제는 어디서 어떻게 바꾸느냐였다.
단말기가 단계별로 안내했다. 도메인 구매처 로그인 → DNS 관리 → A 레코드 추가 → IP 입력. 스크린샷이 필요 없었다. 글자로 된 지시만 따라갔다.
입력. 저장.
서버 세팅. 여기서부터가 지옥이었다.
터미널. 검은 화면에 흰 글씨. 명령어를 치면 결과가 나왔다. 그래픽이 없었다. 버튼이 없었다. 전부 텍스트.
단말기가 명령어를 보냈다. 진호가 복사해서 붙여넣었다.
첫 번째 명령어. 성공.
두 번째. 성공.
세 번째.
빨간 글자. Error.
수정된 명령어가 왔다. 붙여넣었다.
또 에러.
다시 수정. 붙여넣기. 에러. 수정. 붙여넣기. 에러.
다섯 번째에서 멈췄다.
에러를 해결하는 게 세팅이라고. 진호는 웃었다. 기가 막혀서.
그런데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업도 그랬다.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문제가 터지고, 해결하고, 또 터지고, 또 해결하고. 15년 동안 그랬다.
벽돌이 무거우면 벽돌만 생각했다. 에러가 나오면 에러만 해결했다. 같았다.
다시 붙여넣었다.
밤 11시.
에러 17개. 해결한 에러 17개. 새로 생긴 에러 3개.
합계 20개. 그 중 17개 해결. 진행률 85%.
3개가 남았다. SSL 인증서. 이게 안 되면 브라우저에 '안전하지 않은 사이트'가 뜬다고 했다. 자물쇠 모양이 안 나온다고.
무료. 좋은 단어였다. 명령어가 왔다. 붙여넣었다.
에러.
DNS가 아직 전파되지 않아서 인증서 발급이 안 된다고 했다. 기다려야 한다고.
기다렸다. 30분. 다시 시도. 에러. 1시간. 다시. 에러.
새벽 1시에 — 됐다.
SSL 인증서 설치 완료.
브라우저를 열었다. 주소창에 도메인을 쳤다.
로딩.
1초. 2초.
떴다.
어두운 배경. 흰 글씨. 아직 내용은 비어 있었다. 로고 텍스트 하나, 메뉴 세 개 — 음악, 소설, 소개.
빈 사이트였다. 아무 내용도 없는 껍데기.
그런데 — 떴다.
인터넷에. 전 세계에서 접속 가능한 주소에. 진호의 도메인으로.
서초동 사무실에서 글로벌트레이드 홈페이지를 처음 만들었을 때가 떠올랐다. IT팀 3명이 2주 걸렸다. 외주 비용 800만 원. 회의 8번. 수정 12번.
오늘은 혼자, 고시원에서, AI와 함께, 하루 만에 만들었다. 에러 20개를 때려잡으면서.
노트북 화면을 봤다. 빈 사이트. 아무것도 없는 페이지.
그런데 웃음이 났다. 처음으로 — 진짜 웃음이 났다.
조회수 0짜리 유튜브 채널과, 내용 없는 홈페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상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3일 전에는 이것조차 없었다.
기계가 비유를 했다. AI가 비유를.
진호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1초. 2초.
진호가 웃었다. 소리 내서.
기계가 학습했다. 오글거리는 걸 싫어한다고. 기록해 두겠다고.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3초. 5초. 한참을 웃었다.
4개월 만에 처음으로 소리 내서 웃었다. 제대로.
노트북을 닫았다. 침대에 누웠다.
내일은 소설을 쓴다.
아니, 내일은 스마트스토어를 한다. 수익이 먼저다.
사업가의 머리가 돌아가고 있었다. 음악은 씨앗이고, 홈페이지는 땅이다. 하지만 돈은 — 스마트스토어에서 먼저 나올 수 있다.
순서를 바꿨다. 모델 C를 앞으로 끌어왔다.
CEO가 방향을 정하면, AI는 실행한다.
방향을 정했다.
Day 10.
스마트스토어 사업자 등록이 완료됐다. 간이과세자. 업태: 전자상거래. 종목: 소매.
판매자 센터에 로그인했다. 하얀 화면. 상품 등록 0건. 주문 0건. 매출 0원.
또 0이었다. 익숙했다.
진호의 눈이 바뀌었다. 사업가의 눈이었다.
수작업 3시간을 10분으로. 30배. 이건 — 알고 있는 영역이었다. 글로벌트레이드에서 통관 서류 자동화를 했다. 수작업 이틀이 반나절로 줄었다. 그때 매출이 30% 올랐다.
원리는 같았다. 반복 작업을 자동화하면 시간이 남고, 시간이 남으면 규모를 키울 수 있다.
검증된 구조를 가져온다.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15년 동안 해온 방식이었다. 성공한 경쟁사를 벤치마크하고, 구조를 분석하고, 자기 상품에 적용한다. 새로 발명하는 게 아니라 잘 되는 걸 가져와서 쓰는 거다.
차이가 있다면 — 이제 그걸 사람이 아니라 AI가 한다는 것.
위탁 판매. 재고를 안 가져도 된다. 주문이 들어오면 도매처에서 고객에게 직접 보낸다. 진호는 페이지만 만들면 된다.
자본금 0으로 시작 가능. 리스크 0. AI팀장이 처음에 말한 것과 같았다.
도매처를 찾았다. 단말기가 알려준 도매 사이트 3곳을 돌았다. 전기 액세서리 — 콘센트 커버, 멀티탭 정리함, LED 조명 스위치.
마진을 계산했다. 도매가 8,000원. 스마트스토어 판매가 15,900원. 배송비 도매처 부담. 수수료 빼면 마진 약 6,000원.
6,000원. 크지 않았다. 하지만 — 100개 팔면 60만 원. 300개 팔면 180만 원.
문제는 팔리냐는 거였다. 같은 상품을 파는 판매자가 수십 명이었다. 상품은 같다. 가격도 비슷하다. 차이는 — 상세 페이지.
단말기가 작업을 시작했다. 화면에 데이터가 올라왔다. 경쟁자 A — 월 매출 추정 1,200만 원. 상세 페이지 구조: 대표 이미지 → 혜택 3줄 → 스펙표 → 사용 후기 → 배송 안내.
경쟁자 B — 월 매출 추정 800만 원. 구조가 달랐다. 사용 장면 이미지 먼저 → 문제 제기 → 해결책으로서의 상품 → 구매 유도.
진호는 두 구조를 비교했다. 사업가의 눈으로.
진호가 놀란 건 — AI가 '동의합니다'라고 한 게 아니었다. 자기가 영업의 기본을 말하자 AI가 바로 반영한 거였다.
CEO가 방향을 정하면 AI가 실행한다. 처음에 한 말 그대로였다.
2시간 후.
상세 페이지가 나왔다. HTML 파일. 브라우저에서 열어봤다.
깔끔했다. 이미지 배치가 자연스러웠고, 텍스트가 읽기 편했다. 경쟁자 B의 구조를 따랐지만 텍스트는 전부 진호의 상품에 맞게 바뀌어 있었다.
디자이너 외주 비용 30만 원짜리를 — 2시간 만에 AI가 만들었다.
진호는 판매자 센터를 열었다. 상품 등록. 상품명, 가격, 카테고리를 입력했다. 상세 설명란에 AI가 만든 HTML을 붙여넣었다.
미리보기. 화면에 상세 페이지가 표시됐다. 깔끔했다.
등록 버튼.
눌렀다.
'상품이 등록되었습니다.'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나온다. 누군가가 검색하면, 진호의 상품이 뜬다. 클릭하면 AI가 만든 상세 페이지가 보인다. 구매 버튼을 누르면 — 돈이 들어온다.
이론적으로는.
현실적으로는 — 검색 순위가 바닥이었다. 신규 상품. 판매 이력 없음. 리뷰 없음. 상위 노출될 리가 없었다.
1개가 아니라 50개.
진호는 계산했다. 수작업으로 상세 페이지 1개 만드는 데 3시간이면, 50개는 150시간. 한 달 꼬박.
AI 자동화로 1개에 10분이면, 50개는 약 8시간. 하루.
150시간 vs 8시간. 이게 자동화의 힘이었다.
글로벌트레이드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 사업은 확률 게임이다. 한 방을 노리는 게 아니라, 확률을 높이는 거다. 상품 50개를 올리면 그중 하나는 걸린다. 걸린 것을 밀어넣으면 매출이 된다.
Day 14. 자정.
상품 47개 등록 완료.
10일 동안 진호가 한 일: 도매처에서 상품을 고르고, AI에게 카테고리와 타겟을 알려주고, 생성된 페이지를 검토하고, 등록 버튼을 눌렀다.
AI가 한 일: 경쟁자 분석, HTML 생성, 키워드 최적화, 상품 설명 작성.
47개 중 검색에 노출되기 시작한 상품 — 6개. 클릭이 발생한 상품 — 2개.
구매 — 0건.
아직 0이었다.
단말기를 봤다.
기다리는 것도 전략.
진호는 천장을 봤다. 14일 전과 같은 천장이었다. 누런 물때. 가로등 빛.
그런데 14일 전과 달랐다.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은 — 유튜브에 12곡, 홈페이지에 소설 2화, 스마트스토어에 상품 47개가 있었다.
전부 0이었다. 조회수 0, 방문자 0, 매출 0.
하지만 존재했다. 인터넷 어딘가에 진호가 만든 것들이 존재했다. 24시간 동안 진호가 자는 사이에도 누군가가 볼 수 있었다. 클릭할 수 있었다. 살 수 있었다.
벽돌은 진호가 나르는 동안만 움직였다. 진호가 멈추면 벽돌도 멈췄다.
이건 달랐다. 진호가 자는 동안에도 — 일하고 있었다.
씨앗은 심었다.
16일이 남았다.